“전 사실 참으며 계속 일하려고 했는데, 이젠 못 참겠어요. 어제도 번역하는 일 다 끝낼 수 있었는데, 팀장님이 자꾸 다른 일을 시켜서 제대로 하지 못한 거에요. 근데 그게 중요한 일도 아니고, 회사 일도 아니고 다 팀장님 사적인 일이었어요. 그러니 제가 더 열 받는 거죠.” 송팀장은 업무의 반 이상을 사적인 일에 시간을 보내고 있었으며, 그 대부분의 일이 그녀에게 비밀스럽게 주어지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그녀는 마치 송팀장의 개인 비서 같은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리님, 저는 어떡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대리님이랑 하는 M&C프로젝트 일은 재미있는데, 팀장님 비서 같은 일을 앞으로도 계속해야 한다면 차라리 회사를 더 다니고 싶지 않을 정도에요. 지난 5개월 동안 프랑스 대사관, 상공회의소 및 팀장님 주변의 인적 네트워크를 위하여 상당히 많은 자료가 오갔는데, 저도 처음에는 이 일들이 모두 회사를 위한 일이라 생각했었어요. 그러나 이제 저도 일이 돌아가는 것을 잘 알게 되니, 그 일 대부분이 팀장님 개인적 모임 및 관계유지를 위한 사적인 일이더라고요. 그런데도 대리님은 혼자 회사업무를 위해 온 힘을 기울이고, 이와는 반대로 팀장이라는
순간 고요한 침묵을 깨고 조윤희가 기지개를 활짝 펴며 말했다. “대리님, 다 된 것 같은데요?” 신대리는 마치 잠에서 덜 깬 사람처럼 아득히 조윤희를 바라보며 말했다. “으응? 드디어 다됐나?” “한번 보실래요?” “뭐, 봐봤자, 내가 불어를 알아야 말이지? 아무튼 수고 많았어. 나도 덕분에 오랜만에 책 좀 읽었네” “내일 아침에 팀장님 검토하신 후 바로 파리로 보낼게요.” 신대리는 토요일에도 출근하여 투정하나 없이 활짝 웃으며 결국 제 몫을 다 끝낸 지금의 그녀가 잘 꾸민 세련된 모습의 평상 시 보다 더욱 예뻐 보였다. “그럼, 휴일에 고생했는데 얼른 들어가서 푹 쉬자.” “그냥 들어가요? 대리님, 옆 제과점에서 팥빙수라도 먹고 들어가요. 저 오늘 이렇게 고생했는데, 시원한 것도 하나 안 사줄 건가요?” 지금까지 남자들 하고만 근무해왔던 신대리는 처음으로 함께 일하는 여직원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순간 당혹스럽기도 하였다. 그는 시원한 생맥주에 대한 간절한 생각을 떨쳐 버리고, 그녀를 따라 마지 못해 제과점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여자와 단둘이 팥빙수를 먹는 것도 몇 년 전 헤어진 여자친구와 연애했을 때 이후로 처음인 일이었고, 업무시간이 아닌 휴일에 그
박성준은 현장에서 바로 퇴근을 하였지만 신대리는 저녁이 다되어 사무실로 복귀하였다. 그는 돌아오자마자 조윤희의 번역 일부터 챙겼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그녀는 많아진 분량의 사업계획서를 다 끝내지 못하고, 토요일에 나와서 마무리 짓겠다는 약속의 말뿐이 할 수 없었다. 애초에 M&C 본사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영어가 아닌 불어로 번역하기로 했기 때문에, 신대리도 지금 어떻게 해줄 수 있는 일이 더 이상 없었던지라 안타깝기만 하였다. 그는 책임감 있게 일하는 그녀에게 미안함과 대견함을 느끼며, 그저 뒷 일을 부탁한다는 위안과 격려의 말만 해줄 수 밖에 없었다. 다음 날 오후, 계획서가 걱정이 된 신대리는 여지없이 발길을 사무실로 옮겼다. 사무실 문을 여는 순간 습한 무더위에 그는 숨이 턱 막혀왔다. 초여름 오후의 무더위에 에어컨이 나오지 않는 꽉 막힌 작은 사무실은 마치 사우나에 처음 들어가는 것처럼 한 순간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어느 정도 환경에 적응이 된 신대리는 그의 자리에 가방을 내려 놓고 겉 옷을 벗어 놓고는 사무실을 죽 둘러봤다. 책상 여기저기에는 흩어져 있는 자료만 눈에 뜨이고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문득 조윤희의 책상 위에
#1.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코스메틱을 사랑하는 모임-코메당’ 페이스북에서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로 불리는 유명인이 김주희 한국인터텍테스팅서비스 이사다. 여기서 ‘밥=rice’은 마케팅을, 누나는 연결자(connector)를 말한다. 다시 말해서 ‘화장품을 팔아주려고 노력해주는 예쁜 파트너’ 쯤 되겠다. 제품을 팔아준다는 게 유통전문가란 뜻은 아니다. 대신 잘 팔리도록 화장품 입문 단계에서 제대로 컨설팅 해준다는 의미다. 바로 ATIC이다. 화장품법 제20조는 식약처장의 화장품에 대한 검사명령을 규정하고 있다. 이 조항에 따라 ‘식품의약품분야 시험검사등에관한법률’ 제6조제2항제5호에 따른 화장품시험검사기관 중 하나가 한국인터텍테스팅이다. 김주희 이사는 화장품 개발 담당자(Business Development Director)다. ATIC은 △보증(assurance) △시험(testing) △검사(inspection) △증명(certification)의 4단계를 말한다. 단순히 ‘시험성적서’라는 요식행위로 보면 곤란하다. 진짜 제품을 잘 팔기 위해서라면 첫 단추인 ATIC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는 게 김 이사의 말. ”화장품을 만드는 이유는 잘 팔리도
다행히 밤 12시가 되기 전에 일을 마칠 수가 있었다. 집이 먼 조윤희는 10시쯤에 이미 퇴근 하였고, 신대리와 박성준만 변함없이 늦은 밤을 사무실에서 보내고 있었다. 이미 프린트가 된 하나의 사업계획서를 신대리가 마지막 검토를 하는 동안 또 다른 하나의 사업계획서가 더디게 인쇄되고 있었다. “대리님, 우리도 레이저 프린터 하나 신청하죠? 다른 팀이 쓰다 넘긴 이 놈의 잉크젯은 속도가 너무 느려 답답해서 일 못하겠어요.” 인쇄를 기다리는 것이 마냥 답답하다는 듯이 박성준의 푸념이 또 터졌지만, 신대리는 별 다른 대꾸 없이 마지막 한 장까지 검토를 마무리했다. “첫 번째 안은 오타가 몇 군데 있는 것만 빼면 별 문제 없겠는데, 일단 시간이 너무 걸리니까, 다시 인쇄하지 말고 이걸로 내일 보고할게. 근데 둘째 안은 아직 인쇄 안됐어?” “그러게 인쇄가 너무 느려서 안되겠다니까요. 그래도 이제 두 장 남았어요.” “그래? 그럼 인쇄된 것부터 먼저 볼게. 이리 줘봐.” 박성준은 프린터에 수북이 쌓여있는 두 번째 계획서를 조심스럽게 꺼내, 책상에서 두 세 번 탁탁 쳐서 가지런하게 정리한 후 신대리에게 건넸다. 둘째 안은 신대리가 직접 작성한 내용을 박성준이 교정을 보
“윤희씨, 이 사업계획서를 다 번역하는데, 얼마나 걸리겠어?” 문득 신대리는 조윤희를 바라보며 다급히 말을 건냈다. “글쎄요, 이 정도면 제게 하루는 더 주셔야 될 것 같은데요?” “흠…. 그러면 이렇게 하자. 일단 저녁 식사 후에 우리 야근 좀 더 하자. 오늘 밤에 어떤 일이 있어도 유통 전략에 대해서 여러 경우의 수를 만들고 각각의 경우에 맞는 4P전략을 모두 수립해보는 거야.” “하지만 대리님 경우의 수가 너무 많은데요? 브랜드숍, 직영영업소, 대형 전문점 직거래 등에 따라 전략을 다르게 조합하면 이건 사업계획서 하나 만드는 게 아닙니다. 팀장님도 책임 못 지겠다며, 도망가버린 판국에….” 아니나 다를까, 점점 투덜이로 변해가고 있는 박성준의 불만에 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일단 두 가지 경우만 하자. 첫째는 지금 우리 주장대로 브랜드숍 유통으로, 두 번째는 현 영업조직에서 브랜드만 하나 더 얹어서 판매할 경우로.” 신대리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각각의 경우, 4P의 실행전략과 5개년 예상 매출과 손익을 정리하는 거야. 그걸 가지고 내가 내일 아침 최상무님을 만나 뵙고, 현 상황을 설명 드리고 나서 최상무님의 결정을 먼저 받아올 테
사업계획서를 만드는 일은 앞서 걱정했던 것 보다 의외로 쉽게 풀려갔다. 이런 식의 외국 회사에 Business Proposal을 해 본 경험이 없던 신대리는 아직 컨셉 조차 정립되지 못한 M&C의 사업계획을 어떻게 작성할까 고민이 많았지만, 경험이 많은 송팀장이 이번처럼 초기에는 구체적인 컨셉이 없어도 전반적인 사업방향에 대해서만 다루면 된다고 가이드를 주자 일이 일사천리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사실 사업방향은 이미 오래 전부터 세워져 있었기 때문에 이를 좀 더 구체적이고 세련되게 정리한 후, 향후 5개년 매출계획과 손익 정도만 추가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5년간의 매출을 예측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M&C의 브랜드숍이 아직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섣불리 매출을 전망한다는 것은 더욱 힘든 일이었다. 신대리가 구상하고 있는 것은 일단 직영 브랜드숍을 5개 정도 오픈하고 이를 플래그쉽 스토어(Flagship Store)로 활용하여 프랜차이즈 매장을 확대하겠다는 것이었는데, 이럴 경우 회사의 영업부도 하나 더 새로 조직해서 별도의 사업부처럼 이원화해야 하는 한편, 새로 영업부 직원들도 모두 뽑아야 한다는 가장 큰 문제가 남
잉글우드랩 데이빗 정 회장이 2015년 설립한 파머시(Farmacy) 브랜드의 글로벌 확장 전략과 K-뷰티 발전을 위해인디(indie) 뷰티 브랜드와의 협업 계획을 밝혔다. 4월 23일 코스메카코리아에 잉글우드랩의 매각 공시 후 기자와 만난 데이빗 정 회장은 “천성적으로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개척정신이 내게 새로운 도전을 일깨워준 일주일이었다”고 말했다. 지난주 내내 데이빗 정 회장은 잉글우드랩의 미래에 대해 엄청난 고민을 했다고 토로했다. 지난 1년여 동안 미국 글로벌 브랜드의 지인들은 오딧(audit) 통과에 따른 오더 주문과, 아시아 시장을 겨냥해 잉글우드랩을 전진기지로 하는 방안을 놓고 데이빗 정 회장과 지속적인 의견을 나누었다고 한다. 이에 부응하고자 지난해 미국과 한국의 공장 신축 및 증설, 일본콜마와의 협업 등 시스템 구축을 마치고 올해 본격 도약을 다짐했다고 한다. 그 와중에 “코스메카코리아와의 매각 협상이 불거졌고, OEM/ODM 전문기업의 역량을 다시 들여다보게 됐다”고 그는 전했다. 매각 결심엔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개척정신(frontier spirit)'이 새삼 그를 꿈틀거리게 했다고 한다. 12세 때 어머니를 따라 기회의 땅인 미국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