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대리는 약간은 어색한 느낌과 불안한 마음으로 이팀장에게 인사를 했다. 1년이 지난 지금 다시 이팀장 밑에서 일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던 그로서는, 사실 과거 그 때문에 김상무가 물러나고 이팀장도 회사를 떠날 위기까지 갔던 사실을 떠 올리며, 참으로 질긴 악연의 고리를 끊지 못함이 안타까웠다. 이팀장은 의외로 호탕하게 웃으며 신대리를 반겼다. 지난 일은 모두 잊고 우리 함께 다시 시작해보자는 이팀장의 밝은 환영 속에서도 신대리는 그의 표리부동(表裏不同)한 속마음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신대리는 이팀장을 대면하고 36계에 나오는 소리장도(笑裏藏刀)가 생각났다. 즉 이팀장은 가슴에 비수를 숨기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상냥하게 상대방을 대하는 것만 같아 보였다. 아예 이팀장이 회사의 대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얼굴 보며 일하게 됐지만, 그 동안 너 때문에 힘들었고 난 지금도 네가 싫다는 등의 솔직한 마음을 보였다면 오히려 이팀장을 대하기가 더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떠나지 않는 만남이었다. 이제는 어엿한 BM으로 자리를 잡은 신대리는 드디어 그도 저들과 동등한 존재라는 생각에 나름대로 감개무량함을 느꼈지만, 1년 전 시장조사 담당자로서 소외를 받았던 마
M&C 계약 조인식은 신대리의 체크 리스트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되었다. 그나마 계약서 싸인 후 기념촬영할 때 신대리도 박성준의 등떠밈에 마지못해 제일 뒷줄에 서서 결국 사진 속 인물들 중의 하나가 될 수 있었다. 그는 사진기의 플래시가 터질 때마다 마치 브로드웨이 데뷔에 성공한 신인배우에게 쏟아지는 찬사들이 모두 그 하나만을 위해 준비된 것처럼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는 눈 부신 플래시 빛에 간신히 눈을 뜨며 순간순간 투영되어 떠오르는 그 간의 고생을 한 순간이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한껏 밝은 미소를 지었다. 몇 장의 사진 촬영은 매우 짧은 시간이었지만 신대리는 거의 2년이 지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모든 일정이 순조롭게 끝나고 강남역에서 함께 뭉친 그들은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서 그간의 고생을 맘껏 날려 보내며 스스로를 위안했다. 그러나 신대리는 마음 속으로 즐거울 수가 없었다. 팀원들에게 얘기하지 못한 비밀을 이제는 털어 놓을 때가 왔기 때문이다. 2차로 나이트 클럽에 춤추러 가자는 박성준의 제의를 거절하고 신대리는 조용한 바(Bar)로 자리를 옮겼다. "대리님, 오늘 같은 날 갑자기 왜 이리 심각하시죠?" 박성준이 여느 때와는 틀린 신대리가
미셸 리는 확실히 프랑스인들의 사고방식과 그들의 비지니스 방법을 잘 이해하고 있었으며, 수 년간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쌓아온 경험으로 M&C 프로젝트가 한국에서 큰 성공을 하리라는 동물적 감각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그녀는 사업개발팀원들의 열정을 믿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다른 어떤 일들 보다 우선적이고 적극적으로 M&C에 매달렸으며, 그녀의 노력과 협상력의 결과로 M&C본사도 어느새 그녀의 열정을 믿기 시작하게 되었다. 물론 그 과정에 사업개발팀원들은 수 십 번도 넘게 프로포절을 만들고 고치기를 반복하는 힘들고 지루한 시간을 보냈고, 신대리는 그 어떤 일들보다 기다리는 일이 가장 힘든 일임을 새삼 느꼈다. 그 와중에도 사업개발팀원들은 M&C 이외에 송팀장이 던져준 남성용 및 헤어 브랜드로 또 다른 해외 라이센싱 사업을 진행하는 등 여전히 바쁜 일정을 소화해 내야만 했다. 그리고 그 결과 그 해 가을이 되어서야 비로소 M&C의 라이센스 계약이 회사의 요구를 전폭적으로 수용하는 것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즉, 계약기간은 5년이고, 러닝 로열티는 매출실적 등급별로 3~5%를 지급하며, 미니멈 로열티도
“36계에는 이대도강(李代桃僵)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는 복숭아나무 옆에 자두나무를 심어 자두나무가 복숭아나무를 대신에 병충해를 입게 해서, 더 가치 있는 복숭아 나무를 구한다라는 뜻으로, 큰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는 작은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는 전략입니다. 이는 고육계(苦肉計), 즉, 자기 몸을 조금 상처 내는 대신 더 큰 것을 얻어내는 전략과도 일맥상통하죠. 전쟁이든 사업이든 어느 정도의 손실은 따르게 마련인데, 문제는 그 손실이 장기적으로 미래의 이익에 어떤 영향을 미치냐는 것 아니겠습니까? 작은 손해에 집착하다 보면 오히려 손실이 더 커질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처음엔 먼저 손해를 보더라도 그들의 의견에 동조하는 듯하면서, 그 뒤에 더 큰 이익을 챙기는 방식이 되어야겠습니다.” 신대리는 잠시 말을 끊고 아직 준비되지 않은 머리 속에만 있는 생각을 섣불리 먼저 말해야 할지를 잠시 생각하더니만 이내 결심했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여기엔 조삼모사(朝三暮四) 같은 잔 꾀도 필요합니다. 팀장님, 제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조삼모사를 또 설명해야만 할 것 같은데, 괜찮을까요?” “조삼모사? 그래, 계속 얘기해봐요?” 신대리가 고사성어를 자주 쓰는 것
송팀장은 그 동안 항상 유리한 조건에서 일해본 경험이 많은 사람이라 자신의 성과가 날라갈 것 같은 리스크를 감내하기에는 무척 소심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사업개발팀의 업무 속성이 회사의 장기적인 이익 관점보다는 계약을 어떻게든 성사시켜 성과를 올리려는 성향이 다분히 강한 경향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송팀장의 지금까지 경험이 그런 환경에서 익숙하다 보니 쉽게 모험을 하고 싶지가 않는 것이었다. "그래도 이게 판 자체가 깨져 버리면 안될텐데...." 결국 참다 못한 신대리가 또 다시 고사성어를 운운하며 설득에 나섰다. “팀장님, 36계에는 타초경사(打草驚蛇)란 말이 있습니다. 막대기로 풀을 쳐서 뱀을 놀라게 한다는 말인데, 막대기로 치기 전까지는 풀 속에서 보이지도 않는 뱀이 어떤지 모르는 상황 아닙니까? 자칫 뱀에 물릴 수도 있고요. 풀을 쳐서 뱀을 유인한 후에야 비로소 물리지 않고 잡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일단 이렇게 우리의 안을 던지고 나서 상대의 동정을 살펴보는 전략이 좋을 것 같습니다. 게다가 우리에겐 미셸리가 있잖아요. 그녀는 진짜 프로페셔널한 협상가 같던데요?" 신대리의 주장에 송팀장은 어쩔 수 없다는 듯한 제스처로 자료를 처음부터 다시 뒤척이며 말
그렇게 준비가 다 끝나갈 즈음,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미셸리의 이메일이 늦지 않게 도착하였다. 이제부터 프랑스 측이 휴가 가기 전까지 사업개발팀 멤버들에겐 그들의 요구조건에 대한 회사의 프로포절을 만들고, 경영진의 재가를 받아야 하는 멀고도 험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M&C의 요구사항을 검토해 보니 기대와는 달리 매우 부정적이었다. 계약 기간 3년에 미니멈 로열티(Minimum Royalty)는 2억원이고. 러닝 로열티(Running Royalty)가 매출액의 7%나 되었다. 미니멈 로열티는 매출실적과 상관없이 지급하는 고정금액으로서, 최종적으로 러닝 로열티를 정산할 때 공제하고 지급하기 때문에 실적만 좋으면 큰 문제가 없겠지만, 불확실한 환경에서 만약 브랜드가 실패하거나 기대 이하로 매출실적이 저조하게 되면, 실적과 상관없이 무조건 지불해야 하기에는 꽤 부담이 큰 금액이었다. 또한 러닝 로열티 7%도 신 브랜드를 런칭하기 위해 개발비뿐만 아니라 막대한 광고판촉비를 써야 하는 한국시장에 있어서 꽤나 부담가는 금액이었기 때문에, M&C 브랜드를 화장품으로 포지셔닝하기 위한 자금여력이 부족하게 된다면 이번 사업의 매력도는 그리 좋을 것 같지
“이렇게 투자금의 미래 현금흐름을 계산해서 현재의 가치로 환산해야, 지금 현재의 투자비용과 같은 시점으로 비교할 수가 있겠지? 즉, 현재 투자한 금액으로 사업을 해서 미래에 수익으로 들어오리라 예상되는 현금을 IRR(내부수익률)로 할인하여 현재가치로 환산한 금액이, 바로 우리가 지금까지 길게 얘기해왔던 미래 수익에 대한 기회비용을 차감한 현재가치(PV, Present Value)가 되는 거야. 그러므로 이러한 미래에 들어오리라 예상되는 현금의 현재가치 값에서 지금 실제로 투자할 금액을 뺀 것, 즉 NPV(Net Present Value, 순현재가치)가 0보다 크다면 투자의 가치가 있는 것이고, 0보다 작다면 투자할 가치가 없다고 할 수 있는 것이지. 잘 알겠지?” 신대리는 현금흐름에 대한 설명에 이어서 NPV에 대한 설명까지 마쳤으나, 두 사람은 더욱 머리 속만 복잡해지고 아리송하기만 해서, 다시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신대리는 할 수 없이 시간을 더 가지고 NPV에 대한 개념을 다시 한번 설명해주었고, 그 외에도 PBP(Pay-Back Period)와 IRR과 가중평균자본비용(WACC)*에 대한 개념도 설명해 주었다. “다시 한번 요약하면, 투자 경
"나름 객관적인 조사와 분석을 통해 판매예측을 했더라도 이것이 정확할 수는 없어. 그런데도 지금 우리는 이를 믿고 투자해야 한단 말이야. 그러니까 이 불확실한 판매예측을 통해 미래에 들어올 수 있는 수익에 대해 투자하는 것은 미래가 아니라 지금 현재란 말이지. 그럼 만약 같은 돈을 M&C가 아니라 다른 사업에 투자를 하면 어떨까? 아니면 금융상품이나 부동산에 투자할 수도 있고, 가장 쉽게는 그냥 은행에 넣어두고 이자만 받아 먹을 수도 있겠지. 아니지, 현실은 그게 아니라, 우리회사는 분명 자기자본이 부족하니 돈을 빌려와야 할 것이야. 그러니 부채가 증가하고 이 부채에 대해 이자를 내야 하는 상황이거든... 회사는 그런 현재의 부담을 가지고 M&C에 투자하는 거야. 그런데 우리가 예상하는 5개년 손익에는 이런 리스크 중 차입금 이자율에 대한 것만 반영되어 있고, 투자에 대한 기회비용이나 미래의 화폐가치 등에 대한 변수들은 나타나 있지 않다는 거야. 이렇게 많은 회사들이 투자를 할 때, 간단히 매출 및 손익예측만 하거나 경영자의 동물적 감각만 믿고 넘어가는 경우들이 많은데, 나중에 가서 ‘그때 내가 왜 그런 결정을 하였을까?’ 하며 뒤늦게 땅을 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