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던 어느 날, 서대리는 큰 스케치북을 들고 와서 스케치북을 불쑥 내밀며 말했다. “난 이 디자인이 매우 슬림(Slim)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누가 봐도 여성의 손안에 쏙 들어오면서, 보기만 해도 막 가지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해야겠어요. 그래서 몇 가지 안을 스케치 해봤어요.” 스케치북에는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색조제품에 대한 서대리의 생각들이 여러 가지로 무질서하게 그려져 있었다. 사람들이 도대체 뭘 봐야 할지 모르며 어리둥절해 하자 서대리는 몇 가지를 짚으며 설명을 하였다. “타사의 일반적인 색조제품들은 모두 비슷비슷하게 너무나 흔하고 용기도 큽니다. 그래서 저는 그 틀을 깨려고 합니다. 저는 심플하면서도 세련된 디자인을 하고 싶어요. 그런데 단순한 것은 잘못하면 싸구려처럼 보일 수도 있어요. 외국 유명 브랜드들을 보면 그렇지 않은데, 우리나라 것은 왠지 촌스러워요. 그래서 생각한 것이 슬림한 것입니다. 그것도 매우 얇아야 해요. 그렇다고 화장품 특성상 모두 슬림하게 할 수도 없고 해서, 겉보기에 얇게 보이는 거지 실제로 얇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나는 눈의 착시를 이용하자는 거죠. 사람의 눈이 일반적으로 아래로 내려다 보니까 사람의 시선
"우리는 앞으로 워크아웃해야 합니다. 현재 우리회사의 NPD 프로세스로는 도저히 지상과제인 9월 1일 런칭날짜를 맞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워크아웃의 회의 방법과 문제해결방법을 통해 프로세스부터 혁신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과연 불필요한 일이고 방해요인인지를 '왜왜왜왜왜'를 다섯번 외치며 생각하고 생각하기를 반복해야 합니다. 지금까지의 타성과 관성을 모두 다 버리고 맞지 않는 옷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물론 불편합니다. 힘듭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모두 한 순간입니다. 이내 우리 몸이 날씬해지면 더욱 건강해지고 빠르고 옷 맵씨도 멋져 보일겁니다. 저기 서대리님처럼요....."신팀장의 말에 모두들 갑자기 서대리를 바라봤다. 활발한 성격의 서대리는 전혀 부끄러워 하지도 않고 갑자기 벌떡 일어서서 모델처럼 포즈를 취하자 다들 한바탕 크게 웃으며 회의장은 더욱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바뀌었다."그래서...."신팀장은 사람들이 다소 진정된 상태가 되자 계속 말을 이었다. "이제부터 우리는 한 팀입니다. 비록 다른 부서에 속해 있고 부서간 이해관계가 다소 얽혀있다 하여도 우린 지금 한 배를 같이 탔습니다. 손자병법에는 풍우동주(風雨同舟)란 말이 있습니다. 비 바
“맞습니다. 이것 때문에 사업개발팀에서도 매우 고민하였습니다. 저희가 그 때 조사 대행사와 함께 의논했을 때, 조사자들 의견이 이미 국내에서 형성된 M&C 의류 이미지가 다소 고가이고 커리어 워먼으로 연상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M&C는 브랜드숍으로 유통할 중고가 브랜드이고 화장품으로서는 새로운 브랜기 때문에, 이미 여러 브랜드를 사용하다가 하나의 브랜드에 안착하는 시기인 30대 여성들보다 더욱 젊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서대리님의 젊은 디자인 감각이 더욱 중요하다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신팀장은 서대리에게 밝은 미소를 보내고 좌중을 한번 들러 보고 나서 말을 이었다.“우리는 리서치를 통해 소비자의 니즈를 발견하지만, 때론 M&C처럼 최초의 제품, 즉 국내 화장품 브랜드숍에서 최초의 프랑스 브랜드 같은 경우는 소비자를 우리 트렌드로 이끌 필요도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지금 급속도로 커가는 화장품 소비의 주체이자 미래의 헤비 유저인 갓 입사한 20대 초반의 직장여성에게 초점을 맞추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런 리스크들을 다시 한번 검증하기 위해 디자인이 언제 나올지 모르겠지만, 디자인이 나오는 대로 정성조사,
“신팀장! 그런 얘기를 한다면 신팀장도 팀장될 자격이 없지. 이왕이면 신팀장보다 경험 많은 사람을 팀장시키면 되지 않나? 우리 회사에서 나보다 경력 좋은 사람 있나? 그런 문제라면 내가 해결 해 줄 테니, 다시는 내 앞에서 그 같은 얘기는 절대 하지 말게.” “네 알겠습니다. 제가 생각이 모자랐습니다.” “그 애, 데려다 잘 써보게. 나중에 분명 좋은 인재가 될 거야.” 그렇게 해서 허진희는 신팀장과 합류하게 되었다. 신팀장도 다시 생각해보니 역시 민이사 말이 옳다고 느꼈다. 그 동안 신팀장을 색안경 끼고 봤던 사람들보다는 신팀장에게 아무런 편견이 없는 신입사원이 새롭게 일을 시작하는 데는 제격이었기 때문이었다. 허진희는 날씬하다고 하기에는 좀 마른 몸매를 가진, 민이사 말대로 회사에서 제일 이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얼굴도 이뻤다. 긴 생머리에 청순한 얼굴과 마른 몸매는 남자들이 앞 다투어 보호해주고 싶을 정도로 맑고 순수한 매력을 풍겼다. 그러나 조용하고 차분하며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바로 남과 쉽게 친해지지 못해서, 입사 6개월이 지난 지금도 그녀가 회사에 있는지 조차 모르는 사람들도 꽤 많았다. 신팀장도 허진희가 M&C팀으로 자
회사가 발칵 뒤집혔다. 회사 창사 이래 대리가 팀장이 된 적도 없었지만, 마케팅 경험이 부족한 신대리를 중요한 프로젝트의 팀장으로 임명한다는 것은 너무도 위험하고 즉흥적인 발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이사는 마케팅 전문가인 자신이 뒤에서 직접 봐줄 테니까 그런 걱정일랑 하지들 말라며 그들의 말을 일축하고, 결국 신대리를 마케팅 M&C 팀장으로 인사발령 내도록 했다. 신대리는, 아니 신팀장은 이팀장 자리 바로 옆에 수평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아직 팀원이 한 명도 없었지만 이후를 대비하여 두 개의 빈 책상이 신팀장 앞으로 놓여졌다. 신팀장은 다른 사람들의 시기와 부러움의 따가운 시선에 아랑곳 없이 선뜻 팀장의 자리에 앉았다. 아직 팀원 한 명도 없는 팀장이지만, 언젠가 저 빈 자리에는 자신만의 직원이 채워질 것이라는 기대에 마음이 뿌듯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는 한 숨 돌릴 겨를도 없다는 듯 바로 새 팀의 필요사항들을 요청하러 민이사의 방을 노크하였다. “이사님, 아무래도 M&C 런칭을 앞당기기 위해서는 기존의 조직과 프로세스를 전면 재수정해야 할 듯 합니다. 저야 M&C 한 브랜드만 가지고 일을 하지만, 다
“이사님, 품의서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M&C는 단순히 브랜드만 출시하는 것이 아니라 브랜드숍 매장을 오픈하는 것이라서 제품도 300품목을 개발해야 하고, 제품뿐만 아니라 매장의 컨셉과 인테리어 디자인, 매장 운영 메뉴얼 등등을 동시 다발적으로 해야 합니다. 벌써 12월도 반이나 지나갔고, 연말연시에 설날 연휴까지 끼면 9개월 내로 1호점을 오픈하는 건 진짜 불가능합니다.” “신대리, 앞으로 내게 불가능하다는 말은 절대 하지 말게. 단지 좀 더 어려운 일일 뿐이야. 안 된다고 생각하는 순간 기회는 없는 것이야. 내가 좋아하는 정주영 회장이 하신 말씀이 있네. 길이 없으면 길을 찾아라. 찾아도 없으면 길을 만들어라. 알겠나?” 특유의 강한 어조로 처음 입을 열었던 민이사는 어느새 부드러운 말투로 신대리를 대하고 있었다. “이팀장은 신대리가 마케팅 경험이 없다고 자꾸 말하지만, 난 오히려 그게 더 좋다네. 신대리는 섣부른 마케팅 지식이나 경험 같은 찌든 때가 묻지 않은 하얀 도화지 같은 존재야. 이제부터 내가 멘토(Mentor)가 되어 신대리를 코칭(Coaching)하여, 하얀 도화지에 밑 그림을 그리게 해 줄 테니, 신대리는 그림에 자기만의
이팀장을 보자마자 민이사는 왜이리 늦게 왔냐는 듯이 대뜸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M&C 런칭 품의서가 어떻게 된거지? 왜 아직도 이팀장이 가지고 있느냐 말이야?” “그게, 내용도 꽤 많고요, 아직 신대리가 부족한 게 많아서 수정할게 많다 보니 시간이 좀 걸려서 말입니다. 빨리 수정해서 다시 결재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뭐가 그리 수정할게 많은지 그럼 어디 내게 설명해 보게.” 뜻밖의 질문에 이팀장은 당황하여 한 순간 말문이 막혔다. 이팀장은 민이사의 작은 눈이 엑스레이마냥 샅샅이 자신의 속을 꽤 뚫어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저…, 사실은 말이죠. 이 품의서는 신대리가 다 했고, 저는 다른 일들이 바빠서 아직 자세히 검토하지를 못했습니다. 오늘이라도 당장 검토해서 바로 결제 올리겠습니다.” “이팀장! 내가 얼마나 바쁜 사람인지 아는가? 이팀장이 그냥 가지고 있는 동안 자네가 내 시간을 그만큼 뺏은 거나 다름없네. 그리고 다른 일도 아니고 M&C 프로젝트는 우리회사 사활을 건 것이고 사장님께서 얼마나 관심이 많은 프로젝트인지 알아, 몰라?” “네 잘 알고 있습니다.” “그걸 아는 사람이 그래? 지금 이보다 더 중요한
“그래서 지금 저는 이사님이 가지고 계신 사업개발팀에서 만든 M&C 프로포절을 기반으로 어제 브랜드숍 런칭 품의서를 작성 완료하였고, 이제 결재만 올리면 됩니다.” 민이사는 신대리가 이팀장이 왜 어제 회식 자리에서 그를 따돌렸는지, 다른 직원들이 왜 왕따를 시키는지, 현재 마케팅부 직원들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열정이 없는지 등 세부적인 문제점들을 꼬집어 얘기해주기를 기대했으나, 처음부터 끝까지 M&C에 대해서만 얘기를 하자 다소 아쉽기도 하였으나, 내심 신대리가 진정으로 자기 브랜드를 사랑하는 타고난 마케터구나 하는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번진 미소를 지울 수가 없었다. 사실 지금까지 신대리가 한 얘기는 민이사 정도면 그간의 보고서만 보더라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는 것이라서 그리 새로울 게 없었지만, 민이사는 처음 소 도살장 끌려 가듯이 풀이 죽어 있었던 신대리가 M&C에 대해서는 어린 애 마냥 신나서 입이 마를 새도 없이 떠들어대는 모습에서, 자신의 과거 모습을 발견하는 것 같아 차마 그의 말을 끊을 수가 없었다. “그래, 그 품의서를 나도 빨리 보고 싶으니, 오늘 바로 결재 올리고, 그 외 일하다가 어렵거나 힘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