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인사

윤동한 회장, '문익점의 기업가정신' 재조명

한국콜마 윤동한 회장 역사경영 에세이 〈기업가 문익점〉 출간
목면이 조선의 기간산업으로 성장했지만, ‘산업혁명’으로 발전하지 못한 까닭은?
문익점의 '목화씨 사업계획'에서 읽는 현대 경영학의 교훈

최근 한국콜마 윤동한 회장이 역사경영 에세이 〈기업가 문익점〉을 펴냈다. 윤 회장이 ‘붓 대롱에 몰래 목면 씨를 넣어왔다’는 문익점에 주목한 이유는 무엇일까?



#1 안목과 실천정신


윤 회장은 “기업 경영 30년 중 기업가 정신과 경영의 중요한 판단이 필요한 순간 마다 역사 속 인물에서 답을 구하곤 했다”며 “목화라는 상품 가치를 알아보고 거대산업으로 만든 안목과 실천정신에서 ‘기업인’ 문익점을 찾아냈다”고 소개한다.


윤동한 회장은 〈기업가 문익점〉에서 시대정신(zeitgeist)과 기업가정신(entrepreneurship)을 이끌어내고 있다.

추위가 매서운 겨울에도 변변한 옷가지 하나 걸치지 못하고 혹한을 견뎌야 했던 우리 선조들은 문익점의 목화 종자 도입 이후 완전히 새로운 삶의 변혁을 맞이했다. 목화는 무명실, 이불, 솜, 화승총 심지, 군인 갑옷 등 폭넓게 쓰임새가 확산된 산업혁명이었다. 시대를 변화시키고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는 점에서 시대정신에 기여했음을 알 수 있다.


또 목화 재배 과정에서의 역할분담과 인간관계에 윤 회장은 주목했다. '태조실록'이 장인 정천익이 재배에 성공했다고 하지만 문씨 문중의 기록에 의하면 "문익점이 목면 씨앗 재배에 성공했고, 장인 정천익의 집에 머물던 원나라 승려가 씨를 빼는 기계를 만들었다. 문익점의 손자인 문래가 물레를 만들었으며, 손자 문영은 베를 짜는 방법을 마련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윤동한 회장은 “문익점이 일찍이 〈농상집요〉를 읽었고, 아버지 밑에서 농사 경험이 있었던 점을 들어 목면에 대한 지식이 있던 차에, 원에서 목면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귀국 길에 씨앗을 몰래 가져온 것”으로 본다. 즉 평소 농사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기에 목화가 눈에 뜨였다는 것이다.


윤 회장은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이 문익점에게서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 중의 첫째가 혁신적 사고라고 생각한다. 다른 말로는 발상의 전환이다. 더 크게 보면 인식 체계의 전환”이라고 말한다.


그는 “기업이나 개인은 익숙한 시스템과 제도에 적응하여 불편함이 없으면 새로운 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 그런데 문익점을 그것을 해냈다. … 보잘것없는 목화씨 하나가 창출해낸 변화는 오늘날까지 빛이 바래지 않고 있다. 겨자씨의 법칙을 목화씨의 법칙으로 불러도 좋을 것 같다”고 했다.



#2 문익점의 전국 네트워크화


목면 재배 확대는 문익점 가문의 노력으로 전국에 널리 퍼졌다. 조선의 전폭적인 지원도 한몫 했다. 태종 때 토산물에 대한 답례품으로 목면을 썼고, 중종 25년(1530)에 목화의 특산지로 경기도·경상도·강원도·평안도가 기록될 정도로 면작이 이뤄졌고, 막대한 양의 면포가 일본, 유구 등지로 수출됐다. 15세기 말 면포는 유통경제의 한 축이 되기 시작해 화폐 대용으로 사용됐고, 조세 납부에도 통용됐다. 


이렇듯 목면이 산업 구조 자체를 바꾼 혁명적 작물(조효숙 교수 논문)임에도 산업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윤동한 회장은 “문익점 이후 조선에서 생산성을 늘리고 기술의 보완점을 찾는 것에 힘썼다는 기록이 있지만, 거기까지였다. 조정이 목면산업을 소홀히 여겼고, 목면을 납세로 쓰다 보니 관료의 수탈이 심했다. 상황이 이러하니 누구하나 직기 발명이나 개량에 힘쓸 겨를이 없었다”고 안타까움을 전했다.


18세기 영국은 양모를 실로 뽑아 방적산업이 발달하고 다축방적기를 발명하며 산업혁명의 길을 걸었다. 일본은 이를 지켜보며 목면 산업의 중요성을 깨닫고 자동직기(토요다 방직기)를 만들어 생산량을 늘리고 일제 강점기 때 한반도를 면화 식민기지로 만들었다. 역사에는 만일(what if)이 없다지만 참 아쉬운 대목이다. 문익점의 뜻을 이어 산업화에 이르지 못한 것은 역사에 뼈아픈 기록으로 남았다.


윤동한 회장은 문익점에게서 배워야 할 덕목으로 ▲신뢰 ▲위험분산 전략 ▲공유 정신을 꼽았다. 첫째, 목화의 포근함, 실과 옷감은 좋은 상품으로 소문났지만 잘 될 거라는 확신이 없었다면 성공하기 어려웠다. 문익점은 가족의 신뢰를 바탕으로 산청 5대 유력 가문을 통해 목화재배기술을 퍼트렸다.


둘째, 문익점이 열 개의 목화 씨앗을 가져온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윤 회장은 “아마도 적은 개수이지만 여러 종의 목화 씨앗을 가져왔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미 삼국시대에도 목화에서 뽑은 면사로 짠 직물이 있었지만 보편화되지 않았던 점에 비춰 문익점은 다양한 종자를 얻어 한반도 기후와 지형에 어울리는 품종을 택하려고 했고, 이를 정천익과 나눠 재배함으로써 성공 확률을 높였다.


셋째, 재배 기술과 종자 개량에 대한 지적 재산권을 5대 가문과 공유했고 백성들에게도 제공함으로써 100년도 채 지나지 않아 전국에서 목면을 재배할 수 있게 했다.


윤동한 회장은 “부가 독점되는 사회는 위험하다. 많은 사람들이 소비할 수 있는 부를 가질 때 기업들도 발전한다. 그럼에도 기술 이전이나 공개, 기술 공유 등은 아직 제대로 이루어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3 우리나라 최초의 기업인


윤동한 회장이 바라본 문익점은 ”여말선초의 정치·경제적 상황, 집안 환경, 낙향 등 불확실성 속에서 목면의 도입-재배-개량-산업화 등의 ‘사업적 계획’을 세운 경이로운 인물“이다. 이 때문에 윤 회장은 문익점을 ‘우리나라 역사상 지식인 출신 중에 최초의 기업인이자 창업가’라고  말한다.


윤 회장은 ”문익점의 사상과 철학은 오늘날 기업에게 요구되는 혁신적 개발, 전국 네트워크를 가진 마케팅과 영업, 보급 확산의 기법과 묘하게 닮아 있다“며 ”오늘날 현대 경영에서 자주 얘기되는 ‘동반 성장·지속 경영·사회 공헌의 삼박자를 실현한 기업가 문익점’을 재조명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기업가정신 지수(GEI, Global Entrepreneurship Index)라는 게 있다. 우리나라는 2018년 137개국 중 24위에 랭크됐다. OECD 및 주요 아시아국에 비해 여전히 낮은 수준이다.(호주, 5위, 홍콩 13위, 대만 18위) GEI 지수는 기업가적 ▲태도 ▲능력 ▲열망의 3가지 지수와 14개의 세부 항목으로 구분한다.


이중 기업가적 태도의 ‘직업적 선호’ 항목은 52개국 중 49위로 매우 취약했다.(대만 42.8, 홍콩 34.6, 호주 23.8, 한국 21.6) 기업가를 직업으로 선호하는 일반 국민들의 비율이 낮았다. 이는 창업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사회적 분위기 때문이다.


윤 회장은 ‘삼포시대의 젊은이들에게’라는 글에서 “자신의 가치를 높이고 남들과 비교하지 말고 차별화하는 방향으로 힘을 기울여야 한다. 평생 직업시대를 준비하고 그렇게 노력하다보면 길이 열린다. 준비되어 있으면 기회는 온다”고 격려했다. 문익점의 빛나는 업적도 나라와 백성을 위해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낸 결과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윤 회장은 “기업이 시대를 이끌어야 한다. 기업주는 기업이 돈을 버는 곳이 아니라 일터를 제공해주는 곳이라는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며 글을 맺었다.


〈기업가 문익점〉은 “우리나라의 창업 환경과 활동력을 가늠할 수 있는-기업가정신을 개선해야 한다”는 과제를 역사의 교훈을 들어 제시하고 있다. ‘안목과 실천력’을 필요로 하는 화장품 관계자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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