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로 돌아오자 마자 이팀장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신대리는 이팀장이 아무리 소리를 질러대도 이젠 더 이상 여한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미 회사를 떠날 각오로 저지른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팀장의 한바탕 소란 중에 이번에는 김상무 방으로 불려갔다. 신대리는 똑 같은 소리를 다시 한번 들어야 했다. 그들은 위아래도 못 알아 보는 조직의 암적인 존재로 그를 몰아 부쳤다. 점심식사 시간 내내 식사도 하지 못한 채 그들이 퍼붓는 욕을 신대리는 받아 넘겨야만 했다. 그러던 한 순간 김상무도 이제 지쳤는지, 잠시 말을 끊었고 일순 침묵이 방안에 가득 잠겼다. 신대리가 어색한 정막을 깨고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는 더 이상 전 직장에서처럼 도망치듯 회사를 떠났던 겁장이가 아니었다. “팀장님, 상무님. 저는 오늘과 같은 보고를 1년 동안 매월 올렸습니다. 그런데 제가 올린 보고는 위로 올라가면서 누락되고 왜곡되어 왔다는 사실을 오늘에서야 알 수 있었습니다. 무엇이 진정 회사를 위한 것인지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 같은 암적인 존재를 수술해서 도려내시겠다면 마음대로 하십시오. 이미 저는 각오하고 한 일이니까요. 마지막으로 두 분께 진정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손자병법에
“Stuck In The Middle이라, 이에 대해 여러 번 보고한 바가 있다고?” 사장은 신대리의 말을 끊고 다시 한번 강한 눈초리로 이팀장과 김상무를 노려 보았다. 왜 신대리가 직속 상사를 뛰어 넘어 이런 모험을 저지르게 되었는지 비로소 알 것만 같았다. “네, 사장님. 매월 시장조사 보고서를 통해 정기적으로 보고 드렸습니다.” “알겠네. 그래, 어디 계속 얘기해 보게.” 사장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꾹 누르고 온화한 눈빛과 미소로 다시 신대리에게 말했다. “네. 저는 작년에도 하버드대의 마이클 포터 교수가 말한 본원적 경쟁 우위에 대해 여러 임직원들 앞에서 프리젠테이션을 한 바가 있습니다. 경쟁적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제품의 차별화 및 집중화, 아니면 원가적 우위를 이루어야 한다고 강조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중간한 상태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1년이 지나도 변한 건 하나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비록 여러 가지를 포기하는 한이 있어도 무엇 하나라도 경쟁사와 다른 것이 있어야만 합니다. 송곳처럼 날카로운 다른 점 하나가 고객의 마인드를 파고들어가 한 자리를 차지하게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전략을 보면 모두가 비슷비슷합니다.
“이팀장! 내가 직원의 소리를 직접 들어보겠다는데, 뭐가 문제라고 생각하나? 설령 이게 개인적인 보고라 해도 그 정도 판단도 못한다면, 내가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자격이 있겠나?” 갑작스럽게 사장의 목소리가 높아지며,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사장은 자신의 의도를 가로막으려는 이팀장을 용납할 수 없다는 듯이 험악하게 그를 노려봤다. “자 그러시지 마시고 어디 우리 신대리 얘기나 들어보시죠. 신대리 어서 보고하게나.” 최상무가 신대리에게 초점을 다시 돌리게끔 분위기를 잡아나갔다. “네, 그럼 보고 드리겠습니다. 이 보고서는 물론 제가 개인적으로 만든 것이지만, 1년 동안 안테나 매장을 통해 들어 온 우리 주요 고객의 의견을 정리하였으며, 안테나 매장이 한정된 표본수라 생각되어, 전국적으로 그 외 주요 화장품전문점들을 제가 수개월간 직접 방문 또는 전화를 통해 수집한 자료입니다. 이 속에는 비단 화장품전문점뿐만 아니라 지금 급부상하고 있는 브랜드숍을 방문해서 각각의 브랜드숍이 가지고 있는 컨셉과 제품구성을 분석하여..., 경쟁사 대비 우리회사의 현 전략을 비교한 것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 보고서는 비록 저 개인이 한 일이겠지만, 그 내용은 감히 객관적인 조
지금도 나는 가끔 생각한다. 그때 내가 회사를 떠나지 않았다면, 그 때 지점장이 나를 한 순간이라도 보호해주었다면, 그때 내가 그 대형대리점을 담당하지 않았다면… 과연 내가 대기업에서 계속 어떤 모습으로 살아왔을까? 어찌 되었건 나는 분명 그때 지점장을 극복하지 못하고 도망친 것이었다. 한 순간의 젊은 혈기로 무책임하게 회사를 떠난 나도, 자신의 위기를 모면하려고 책임을 전가한 지점장도, 모두 책임감 없는 사람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나 하나를 보고 따르며 법인으로 전환하고 노력했던 작은 대리점 사장들을 버렸고, 그 지점장은 한 젊은이의 꿈과 미래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말았다. 퇴직처리를 하기 위해 본사 인사팀을 갔다가 나는 우연히 영업부에서 같이 근무했던 선배를 만났다. 당시 TFT에 차출되어 본사 건물에서 일했던 선배는 내가 회사를 그만둔다는 말에, 너처럼 성과가 좋은 사람이 왜 회사를 그만두냐며 이유를 집요하게 물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신세한탄처럼 지점장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회사를 떠났다. 그런데 그후 1년 후에 나는 입사동기로부터 깜짝 놀랄 소식을 들었다. 지점장이 좌천되었다가 회사를 떠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만났던 선배가 소속되었던 곳이
다음 날 아침, 평소보다 1시간 일찍 출근한 신대리는 아직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당장이라도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한 시간이 지나, 평소 9시 꽉 채워서 출근 하던 박성준도 나름 일찍 출근한다고 나왔지만, 아직 어떤 소식도 들을 수 없었다. 평소 사장은 8시 좀 넘어 출근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출근하자마자 보고서를 읽으셨다 해도 어떤 결과가 나오기는 아직 먼 시간이었지만, 당사자 입장에선 여간 조급한 게 아니었다. 어느새 10시가 지나 이미 다른 사람들은 바쁜 일상으로 돌아가 있었지만, 두 사람은 일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이팀장이 뛰어들어올 것만 같은 불안한 마음에 점점 더 조급해지기만 했다. “대리님, 우리 옥상이라도 올라가 바람이라도 쐴까요?” 답답함을 참지 못해 박성준이 먼저 말을 꺼냈다. “그러자. 나도 좀이 쑤셔 죽겠다. 날이 좀 춥지만, 자금 당장은 맑은 공기가 필요해. 어서 가자.” 두 사람은 옥상에 올라가 크게 심호흡을 하였다. 한 겨울 매서운 추위에도 불구하고 한 동안 두 사람은 추운 줄도 몰랐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따뜻한 커피마저 다 마셔 버리게 되자 갑자기 추위가 엄습해 들어왔다. 마침내
“넌 아직도 가치부전의 진정한 뜻을 모르는구나? 거짓 가(假). 어리석을 치(癡). 아닐 불(不). 미칠 전(癲), 즉, 바보인 척은 하되 미치지는 말라는 것이잖아. 내가 그 유래까지는 자세히 설명 안 한 것 같으니 잘 들어봐. 삼국지에서 조조가 세운 위(魏)나라 알지? 거기에 제갈공명에 비길만한 사마중달이 있었는데, 노년에는 왕족인 조상(曹爽)이 그의 힘을 두려워하여 실권도 없는 지위로 내쫓아 버려서, 그는 병을 핑계로 조정에 나가지 않게 되었어. 그래도 사마중달의 행동을 수상이 여긴 조상은 부하에게 병문안을 가서 사마중달을 살펴오라고 하였는데, 가보니 그는 옷도 엉터리로 입고, 죽을 먹을 때도 질질 흘리며, 완전 정신이 나간 것같이 행동한 거야. 이것을 본 부하들은 정말 정신이 나간 것으로 알고 조상에게 본대로 보고를 해서 적을 방심시킬 수 있게 되었지. 그러면서 사마중달은 사전에 자신을 도울 사람을 포섭하고 군사를 정비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실권을 잡게 되어, 결국 그 유명한 삼국지의 조조가 세운 위나라도 망하게 된 것이야. 즉, 때를 기디리기만 하면 안 되고 적극적으로 준비하면서, 우리를 도와 줄 사람도 포섭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알겠냐?” “아~ 네네
"괄목상대(刮目相對)라는 말이 있다. 너도 잘 알지? 그런데 그게 어디서 유래된 말인지 아니?” “네... 뜻은 대충 아는데, 유래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네요.” “한자를 풀어 보면, 눈을 비비고 다시 보며(刮目) 상대방을 대(對)한다는 뜻으로, 다른 사람의 성과나 학식이 크게 진보한 경우를 말하는 것인데, 그 유래는 우리가 잘 아는 삼국지에서 나오는 거야. 시간이 조금 남았는데, 얘기해줄까?” “네. 어서 해주세요. 나도 삼국지를 한번 읽었는데 그런 건 기억이 잘 안 나네요.” “그래. 그럼…, 오나라 손권의 부하 중에 여몽(呂蒙)이라는 장수가 있었는데, 여몽은 잘 알지?” “네. 잘 알죠. 오나라 주유가 죽자 대장군이 된 사람이죠.” “그래, 맞아. 그런데 여몽은 졸병에서 시작하여 장군까지 된 사람이라 용맹하고 충성스러웠으나, 한마디로 무식했어. 그래서 손권은 그가 장군으로서 이론적인 병법까지 알아야 한다며 학문을 깨우치도록 여러 번 충고를 했다고 하네. 이때부터 여몽은 전쟁터에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공부했다고 하더라. 얼마 후 손권의 참모이자 뛰어난 학식을 가진 노숙이 여몽과 의논할 일이 있어 찾아왔는데, 여몽과 막역한 사이여서 여몽을 누구보다도 잘
“잘 봐라. 일단 우리회사의 가격이 예상보다 더 크게 무너지고 있어. 회사는 직영영업소가 있으니, 당장 실적만 나오면 좋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마진이 점점 더 깎이고 있는 대리점들도 함께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어. 그러니 회사는 대리점이 떠난 공백지역에 또 직영영업소를 설치하고 매출을 증가시키고 있는데, 사실 눈에 보이지 않게 직영영업소 유지를 위한 사무실 임대료 및 인건비 등의 고정비 부담이 다시 회사에게 큰 타격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게다가 영업소장들이 자체적으로 조정한 할증 때문에 재고수불이 제대로 맞지 않고 있어,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영업소장들도 앞으로 남고 뒤로 까지는 엄청난 사태가 곧 벌어질 거야.” 신대리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한숨을 쉬면서 계속 말을 이었다. “휴~! 게다가 브랜드숍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기며 화장품 매장을 하나 둘씩 빼앗아가고 있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고. 앞으로 시판시장은 브랜드숍으로 인해 엄청나게 큰 전환점을 가지게 될게 뻔한데, 그 시기에 함께 편승하지 못하면 어쩜 우리회사는 문을 닫을지도....” 신대리의 얘기가 너무 비관적으로 흐르며 회사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충격적인 말로 이어지자, 박성준은 신대리가
다음 날 신대리는 박성준에게 자신이 조사했던 두툼한 보고서를 보여주며 아미앙떼의 문제점을 설명해 주었다. “4P 측면으로 아미앙떼를 분석한 보고서야. 그리고 그 첫 장을 잘 봐. 두툼한 보고서를 한 장으로 요약한 것이니. 일단 내가 간략하게 설명해 줄 테니, 나머지는 네가 틈나는 대로 살펴 보고 깊이 숙지해야 해. 그리고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알겠지?” “와우~! 이런 걸 혼자 만드시느라 고생 좀 하셨겠네요?”박성준은 자기를 빼놓고 생고생한 신대리를 놀리 듯이 말하였다. “자자~ 그 얘긴 이제 그만 하고, 잘 들어 봐.” 신대리는 박성준의 농짓거리를 한 칼에 제압하고 말을 이었다. “먼저 Product, 제품 측면에서, 아미앙떼의의 세라마이드 성분의 보습 컨셉은 이미 경쟁사에서 한 발짝 먼저 출시하여 성공한 것으로써, 현재는 콜마 같은 OEM회사에서도 쉽게 생산, 공급할 수 있는 것이야. 이런 기능적 비차별점을 극복하기 위해 경쟁사는 제품 중 한 품목이라도 집중적으로 차별화하여, 남들과 다른 컨셉을 만들고 있는 반면, 아미앙떼는 주력 품목 없이 브랜드 전반적으로 새로운 공법에 의한 혁신적 제품임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건 완벽하게 소비자를 무시한 개발자 마인
“그래요? 요즘 대리님 눈치 보느라 힘들었어요. 뭘 그리 골똘히 생각하시는지, 뭐라 말해도 들은 척도 안하고, 일도 모두 다 저보고 알아서 하라고 하고….” 신대리는 깜짝 놀랐다. 자신은 티 안내고 혼자서 잘 처리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박성준 눈에는 그의 행동들이 이상하게 보였다는 것이다. 신대리는 얼른 그의 입을 막으며 말을 했다. “성준아~ 잠깐만, 우리 회의실에서 얘기 좀 할까?” “네? 아~, 그러지요.” 박성준은 역시 이상하다는 듯이 신대리의 뒤를 따라 회의실로 들어오며 말을 했다. “그러게, 뭔 일 있는 거죠?” “아냐? 뭔 일은…. 그냥 벌써 연말이라 나도 덩달아 기분이 들뜨네” “사실 저는 대리님이 다른 회사로 떠나는 거 아닌가 생각도 했어요. 사실 저 같아도 그래요. 회사에서 잘 알아 주지도 않는 조사나 하고, 입사한지 몇 년 안 된 저도 벌써 권태롭기까지 하니…. 입사동기들은 저보고 한직이라 부럽다고 하는데, 저는 정말 짜증 납니다. 그래서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이 있는데, 그 동안 대리님 눈치 보느라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거든요. 이 참에 얘기해도 될까요?” “아, 그래? 그 동안 너무 신경 못써줘서 미안해. 무슨 얘기인데?” 신대
지점장의 구박에도 불구하고 나는 10개의 대리점에 쉬지 않고 매일 나갔다. 그러나 실적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리 쉽게 늘어나지 않았다. 나는 대리점 사장들과 이야기하면 할 수록 각 대리점 마다 보이지 않는 매출에 대한 어떤 벽같은 한계를 느껴야만 했다. 그러다 문득 예전에 목수로 일하고 계시는 먼 친척으로부터 문을 짜려면 먼저 ‘문틀’을 잘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났다. 그때 들었던 문 만드는 과정을 보면, 먼저 싸구려 각목으로 문틀을 맞추고 나서, 그 문틀에 맞게 고급 원목의 문을 만드는 작업을 하기 때문에, 문틀을 벽에 딱 알맞게 제대로 짜지 못하면 나중에 만든 고급 문이 맞지가 않아, 결국 비싼 문을 폐기하고 다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멋진 문이라도 문틀에 맞춰야만 하고, 그 문틀에 따라 크기가 결정되어진다는 것이었다. 나는 한순간 이것이 바로 대리점 사장들의 문제였구나 하고 어떤 깨달음을 느꼈다. 일반적으로 대리점 사장들은 자신의 매출의 한계를 이런저런 비용이나 세금문제 및 시장환경 등의 사정으로 스스로 문틀의 한계를 지어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A대리점은 월 3천만원, B대리점은 4천만원, C대리점은 5천만원... 항상
다음 날 신대리는 오전 업무를 간단히 정리하고 바로 늘상 해왔던 것처럼 안테나 매장에 방문하겠다는 핑계로 회사를 나와, 회사와 떨어진 조용한 까페를 찾았다. 그는 어제 만든 아미앙떼 현황 및 문제점 리스트를 가지고, 앞으로 이를 입증하기 위해 보강해야 할 자료를 수집할 목록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는 일단 4P 측면에서 접근해 보기 시작했다. 제품(Product) 측면에서 보면 이미 브랜드별 판매실적 분석 및 제품에 대한 고객 반응 등이 그 동안 잘 정리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문제는 다음의 대안이 없다는 것이었다. 아미앙떼가 아니라면, 과연 어떤 후속 브랜드를 출시해야 할지에 대한 답이 없었다. 결국 고객이 원하는 제품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아미앙떼가 잘 안된 근본 원인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조사해볼 필요가 있었다. 먼저 문제를 알아야 해결 방법이 나오기 때문이다. 가격(Price)과 유통(Place) 측면에서는 한 가지만 빼고 더 이상의 조사가 필요 없을 정도로 가장 잘되어 있었다. 장려금 및 할증 정책에 의한 가격할인은 갈수록 심해지고 신유통으로 부각되고 있는 브랜드숍과 홈쇼핑 등 때문에 대리점과 화장품전문점 체제의 붕괴는 더욱 가속화되어 가고 있어, 이를
다음 날 아침, 신대리는 술이 덜 깬 눈으로 간신히 출근하였지만, 정신만은 또렸했다. 어제 밤에 이팀장 책상 위에 올려놓은 보고서를 술김에 확 치워버리고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너무 늦게 출근하는 바람에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이내 마음을 비우고, 자리에 쓰러지듯 앉아 졸린 눈을 간신히 뜨며 컴퓨터를 켰다. 오늘따라 유난히 컴퓨터 부팅되는 시간이 더욱 길게 느껴졌다. 기다리는 동안 문득 어제 강소장과 나눴던 얘기가 생생하게 생각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함께 있는 박성준이 문제였다. 분명, 혼자 하기 벅찬 일이지만, 박성준에게 도움을 청할 일은 아니라 생각됐다. 게다가 별도의 일을 수행한다는 것이 자칫 이팀장 귀에 들어갈 수 없도록 해야 하기 때문에 철저하게 위장도 해야 한다. 문득 지난 번에 읽었던 손자병법의 군쟁(軍爭)편에 나왔던 구절이 생각나자 그는 얼른 책을 꺼내 다시 한번 찾아봤다. ‘선지우직지계자승(先知迂直之計者勝)’, 즉 가까운 길을 돌아가는 법을 먼저 아는 자가 승리를 거둔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이우위직, 이환위리(以迂爲直, 以患爲利)’란 말도 생각났다. 해석하면 돌아가는 길이 곧장 가는 길이 되어, 나의 어려움을 유리함으로 만들어
“아니 말이야….” 한사장은 말을 꺼내려다가 열을 참지 못해 말문이 막힌 사람처럼 어이가 없다는 듯이 입을 닫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 좀 마음이 가라앉았는지, 그는 의외로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꺼내기 시작하였다. “내가 신입사원에게 말해봐야 소용없겠지 하고, 아무 말 안 하려고 그랬는데 말이야~!” 한사장은 또 다시 말을 멈추고 잠시 뜸을 들이다가, 이내 그간 참았던 불만들을 한 번에 쏟아내기 시작했다. “어떻게 담당 바뀌자 마자 이럴 수가 있나, 어? 내가 주문도 안 한 것이 아침부터 끊임없이 들어오고 있단 말이야. 오늘 물건 들어온 게 얼마인지 알아? 사람이 숨돌릴 시간을 줘야지, 좀 살만하다 싶으면 어찌 이리 밀어내고 지랄들이야? 내가 지난 번에 회사 들어가서 또 한번 밀어내면 식칼로 다 찔러 죽인다고 한 거 알아 몰라? 그런데도 또 밀어내? 네 놈이 죽고 싶어 환장한 거 아냐?” “네? 아…, 저….” 상황파악이 잘 안된 나는 당장 뭐라 할 말을 잃었다. 단지 오늘 아침 장대리가 어깨를 두들기며 격려하던 중에, 지점장이 얼굴 한 구석 가득 느끼한 표정을 지으며 ‘오늘 처음이라 고생 좀 할 꺼야’ 하면서 슬쩍 던진 말이 무엇을 의미했는지를 이
정상이 평평해 ‘테이블’(Table)이란 이름이 붙은 것처럼, 무슨 산이 해발 1086m 정상에, 칼로 싹둑 자른듯한 평지가 축국장 15배 크기로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 지금으로부터 4억~5억 년 전에는 얕은 바다에 형성된 거대한 사암 덩어리였던 것으로 추정되나, 장기간에 걸친 지각운동으로 어느새 해발 1천86m까지 치솟은 넓직한 산이 되었나보다. 이 때문에 이 주변을 항해하는 선원들에게는 오래 전부터 길잡이 역할을 톡톡히 했다고 전해진다. 원래 등산 및 하이킹 코스가 있어 걸어서 올라갈 수 있지만, 정상까지 편하게 케이블카가 연결되어 있어 나는 케이블카를 탔는데, 케이블카가 360도 회전하여 오르내리며 모든 풍경을 다 벌 수가 있다. 내가 오후 2시쯤에 올라갔을 때는 쾌청한 날씨 덕에 푸른 바다와 케이프타운 도시의 전경이 시원스레 펼쳐져 보였는데, 저녁에 워터프론트에서 바라봤을 때는 정상에 구름이 끼어, 걸쳐 있는 구름이 마치 테이블에 식탁보를 덮어놓은 것처럼 보여, 더욱 신비감을 주었다. 정상 부근에는 야생화를 비롯해 이곳에서만 자라는 식물이 다양하게 서식하고 있으며, 또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대서양의 풍광은 아프리카의 대자연 중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