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다 보니, 지금 시장에 깔아 논 미수금이 장난이 아냐. 어느 화장품전문점이 담보를 제공하고 장사하겠니? 게다가 요즘은 브랜드숍이 증가하면서 전문점들도 수시로 사라지고 있는 판인데, 이렇게 제대로 된 담보도 없이 계속 거래하다가 큰 전문점이 몇 개 터지면 말이야..., 그대로 난 쪽박 찬다, 쪽박...!
신대리 생각해봐. 솔직히 말해서 이게 내 사업이라면 그런 위험을 감수라도 하겠지. 위험 부담만큼 내가 노력하면 돈이라도 많이 버니까 말이야. 그런데 회사 월급만 받고 계속 이렇게 영업하다가 부실 채권이라도 떠안게 되면, 회사는 분명 내게 물어내라고 할 것이 뻔하잖아. 처음엔 부실채권도 그리 얼마 안 되어서 할증과 장려금으로 나름대로 조정하면서 떨어냈는데, 그게 어느새 조금씩 쌓이더니만, 이대로 1년만 더 가면 수 천만 원이 될 것 같아.
나중에는 월급에, 퇴직금까지 못 받고 쫒겨 날까 두렵다, 두려워~. 그런데 이런 고민을 누구에게도 말을 못하겠어. 뒤늦게 영업소장 된 친구들은 아직 이런 사태까지 파악을 못하고 있어. 게다가 최상무님까지 그만 두신다고 하니….”
“뭐? 최상무님이 그만 두신다고?”
“응. 최상무님은 원래부터 직영영업소 확대하는 것을 반대하셨잖아. 영업임원이 반대하는 정책을 회사가 억지로 밀어부친 것이지.”
“그건 나도 알아. 나도 최상무님 생각처럼 이건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 얘기 했었잖아.”
“최상무님도 계속 문제점을 얘기했지만, 임원진 회의에서 혼자 이길 수가 없었어. 그런데도 나중에 잘못되면 모든 책임이 영업임원인 최상무님에게 몰릴 게 뻔하고, 마침 요즘 원래 좋지 않았던 간 건강도 안 좋다고 하셔서, 그 핑계로 쉬어야 한다고 사임을 표하셨나 봐.”
최상무는 25년 전에 회사에 신입 영업사원으로 입사해서 임원까지 진급한 영업부의 산 증인이었다. 화장품 방판시절부터 지금까지 격동의 세월을 고스란히 회사와 함께 동고동락하였지만, 회사에서는 정치적 논리 때문에, 이제 시대가 바뀌었는데 최상무가 너무 경직된 사고로 자기 주장을 고집한다고 몰아 부치기만 했다. 사실 그의 혜안과 결단력, 직원들을 사랑하는 리더십은 그만의 카리스마를 만들었으며, 그는 영업직원뿐만 아니라 대리점 사장들의 존경까지 한 몸에 받고 있는 진정한 리더였다.
그러자 차기 부사장 자리를 노리는 몇 명의 임원들이 단합하여 최상무를 견제하기 시작했고, 어려운 회사 상황을 영업임원이 극복하지 못하고 망쳐놓고 있다는 식으로 그를 공격하였다. 원래 이런 정치게임보다는 오직 실적으로만 승부를 하는 스타일인 최상무는 다른 임원들과 정치적 경쟁을 하고 싶어 하지도 않아서 그런지, 결국 병원에서 안정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진단을 받았다며 회사를 떠나겠다고 말을 한 것이다.
최상무는 신대리에게도 무척 특별한 분이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입사 당시 최상무가 신대리를 매우 좋게 봤기 때문에 좋은 대우로 회사에 합격할 수 있었다고 했고, 작년에 신대리를 마케팅에 보낸 것도 최상무의 주장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최상무는 그 동안 신대리의 보고서에 대해 가장 큰 지지를 보냈고, 지속적으로 격려를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신대리는 그를 직장 상사를 떠나 인생의 좋은 선배이자 스승으로 여기기까지 했다.
“그래, 결국 올 것이 오고 말았구나. 나도 사실 최상무님이 이사회에서 궁지에 몰린다는 얘기를 옆으로 들었어. 매번 마케팅 김상무가, 자기는 브랜드 하나 제대로 만들지도 못하면서, 매출 감소 원인을 모두 영업 탓으로 돌려 최상무를 몰아 붙인다고 하더라. 그런데 다른 임원들까지 한 패가 되어 최상무님을 공격하니까, 어쩔 수가 없었을 거야. 젠장, 이렇게 될 때까지 나도 최상무님께 너무 무심했던 것 같아.”
신대리는 억울하다는 듯이 언성을 높이며 말하다가 마치 최상무의 퇴사가 자기 탓인 것처럼 순식간에 풀이 죽어버렸다.
“야, 임마, 그만해라. 상무님 떠나는 게 왜 너 때문이냐? 어쨌든 우리회사도 큰일 났고, 나도 큰일 났다. 네가 재발 좀 어떻게 해봐라.”
“내가 뭘 어떻게 해? 맨날 회사에서 허송 세월만 보내는 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