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윤창소설] 인식의 싸움 89. 해외 출장(2)

다음 날 오전, 신팀장은 이태리 메이크업 전문 제조회사인 인터코스를 방문해 올 해의 세계 칼러 트렌드를 프레젠테이션 받고, 다양한 샘플을 보고 발라보면서 정대리, 남대리와 함께 주요 색상의 견본을 결정하였다. 이 견본을 토대로 첫 출시될 립스틱과 아이섀도우 등의 다양한 칼러가 준비될 것이다. 
        
그리고 오후에 방문한 곳은 각종 에스테틱 전문 브랜드들의 전시관들이었다. 신팀장은 이곳에서 앞으로 나올 기초화장품의 아이디어와 콘셉트를 찾기 위해 각 부스를 돌아 다니며 제품을 둘러 보았다.
        
 화장품에 대해 아직 전문성이 부족한 신팀장은 들고 다니기가 힘들 정도로 각종 카타로그를 무조건 열심히 모았다. 그는 나중에 한국에 돌아가서 여러 사람들이 검토하면, 이중에 뭐라도 하나 참신한 아이디어가 걸리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감이 컸었다. 
     
그러나 하루를 마감하는 정보 공유 미팅에서, 팔이 빠지도록 가져온 그의 수 많은 카타로그들은 중복되고 불필요한 것들로 분류되고 걸러져서 거의 반이나 버리고 돌아가야만 했다. 그는 갑자기 수북이 버려진 카타로그 뭉치들이 하루종일 메고 다녔던 어깨의 통증으로 느껴졌다. 그런 아쉬움과 함께 볼로냐 코스모프로프의 마지막 밤도 저물어갔다.


      
다음 날, 월요일에 있을 파리 M&C본사와의 미팅 약속 이전에, 일행들은 황금과도 같은 주말 자유시간을 맞아, 바티칸 시국과 로마, 피렌체 등을 개별적으로 관광하기로 하였다. 신팀장은 고대 로마의 화려한 신들의 시대에서부터 시작하여, 중세 카톨릭 성당을 보며 하느님에 대한 경이롭고 위대한 유산에 큰 감동을 느꼈지만, 오직 신에만 의존하던 인간들이 현실에 눈을 뜨며 인간으로서의 자아를 찾아가는 르네상스 시대의 작품들을 보며, 결국 신이 아닌 인간이기에 더욱 처절했던 아름다움의 의미를 느낄 수가 있었다. 
        
그리고 바로 지금 그가 회사에서 새로운 르네상스를 열기 위한 고통스런 몸부림을 치고 있다는 생각에, 르네상스가 그에게 주는 아름다움은 단순히 문화적 테두리를 벗어나, 새 세상에 대한 꿈과 희망으로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이번 여행을 통해 신과 인간, 그리고 전통과 문명이 한 곳에서 어우러진 이태리의 문화에 한껏 매료된 그는 진정으로 이번 출장에 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화려한 로마보다는 가는 곳 거리거리가 모두 문화재인 피렌체에서, 개발이란 명목 하에 무너진 대한민국의 전통과 문화를 돌이켜 보며 진정한 아름다움은 바로 우리의 것이 아닌가 하는 영감을 받았다. 이때 그는 지금 비록 외국 브랜드를 라이센스한 상품을 판매하려고 하지만, 앞으로 진정 그가 해야 할 일은 아름다운 대한민국, 우리의 것에 대한 깊은 성찰과 함께, 이를 세계적으로 알릴 수 있는 강한 브랜드를 꼭 만들고 싶다는 마케터로서의 굳은 다짐을 마음 깊이 새겼다.
        
그렇게 꿈같던 주말이 흘러가서 일행들은 파리에 도착하였다. 파리에 도착하자 마자 민이사와 신팀장은 별도로 미셸리를 만났고, 다른 일행들은 파리 시내 화장품 매장에 대한 시장조사를 하기로 하였다. 낭만의 도시 파리에 와서 구경 한번 제대로 못하고 하루 종일 미팅만 해야 하는 신세에, 신팀장은 떠나는 다른 이들을 못내 아쉬워하며 그저 파리에 다시 돌아올 훗날만 기약하였다.
           
  신팀장은 M&C 해외 라이선스 디렉터인 마담 소피를 지난 번 서울에서 인사만 하였을 뿐, 가까이 만나 이야기를 해보지는 못했었다. 그러다 지금 파리에서 그녀를 가까이 만나보니, 그때와는  그녀가 새삼스럽게 달라 보였다. 그녀는 비록 50대라 하여도 날씬하고 세련된 파리의 패션 회사 중역이라기 보다는, 의외로 약간 살이 있는 우리나라의 수더분한 아줌마와 같은 타입이었다. 반면 함께 미팅에 참석한 그녀의 부하직원들이 바로 영화에서나 나올 것 같은 아름다운 파리지엔느들이라 할 수 있었다. 
            
신팀장과 민이사는 미셸리의 소개로 마담 소피와 그녀의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본격적으로 미팅에 들어갔다. 미셸리는 미팅 내내 단순한 통역 수준이 아니라 마치 회사를 대변하는 사람인양 신팀장과 민이사의 의견을 자신있고 소신있게 이끌어 갔다. 신팀장은 그녀가 과연 한 회사의 CEO임에 틀림없구나 하는 감탄의 눈으로, 한 살 위인 그녀를 마치 고귀한 여신인양 우러러 봤다. 그의 눈엔 푸른 눈의 금발 여성들보다, 그녀가 이 자리에서 가장 빛나 보이기만 했다.

- 계 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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