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이사님, 저 그게…, 마케팅부 신대리입니다.”
“어? 근데 오늘 왜 참석 안 했지? 저리 가서 함께 하지 그래?”
“아닙니다. 일이 있어서 오늘은 좀…, 다음에 뵙겠습니다.”
신대리는 얼른 계산을 마치고 도망치듯이 뛰쳐나왔다. 마치 죄지은 사람처럼 어쩌지를 못하며 도망 나온 자신의 모습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얼떨결에 따라 나온 김대리도 어리둥절하긴 마찬가지였다.
“아니, 이 참에 민이사님이랑 같이 한잔 하며, 얼굴 도장도 확실하게 찍지 왜 도망 나와요?"
“그러게, 김대리. 나도 잘 모르겠네. 내가 이팀장 때문에 점점 바보가 되가나 보다.”
김대리는 뭐라고 한말 더하려다 신대리의 표정을 보고는 하고 싶었던 말을 참고 말했다.
“그럼, 어디 다른데 가서 한잔 더할까요?”
“아냐, 오늘은 그만 집에 갈래. 내일 보자.”
신대리의 심각한 표정에 김대리도 알았다는 듯이 그를 더 이상 잡지 않고 발길을 돌리려다 다시 그를 붙잡으며 말했다.
“신대리님, 지난 번 제게 말씀 하신 것 있죠? 거~ 외~, 만천과해(瞞天過海)란 말이요. 저는 신대리님 했던 그 말이 꽤 인상 깊어서 인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답니다. 만천과해~! 꼭 잊지 마세요. 오늘은 이만 들어가 쉬시고, 내일 다시 예전의 대리님 모습으로 만나길 바랄게요.”
그 말을 남기고 떠나는 김대리를 멍하게 바라보며, 신대리는 만천과해란 말을 되뇌이고 있었다. 만천과해((瞞天過海), 하늘(천자)을 속이고 바다를 건넌다는 이 말은 당태종이 요동을 정벌하러 출전을 했을 때, 황제가 물이 두려워 바다를 건너려고 하지 않자, 장수인 설인귀가 배에 장막을 치고 연회를 베풀어서 천자인 당태종도 모르게 바다를 건넜다는 말에서 유래된 말이다. 즉 다른 사람을 자연스럽게 속여서 큰 일을 도모한다는 의미였다.
신대리는 한 달 전 김대리에게 그의 입장이 꼭 만천과해 같다고 하며 그 의미를 이야기 해준 적이 있었다.
“만천과해요?” 김대리의 질문에 신대리는 삼국지에 나오는 일화를 이야기 해주었다
“응. 당태종에서 유래된 이 말은 36계 중 가장 첫 번째로 나오는 전략인데, 삼국지에 나오는 오나라 장군 태사자(太史慈)가 아주 기묘하게 활용한 사례가 있어.”
“저도 삼국지는 읽어 봤지만 태사자는 잘 기억이 안 나네요.”
“워낙 사람들이 유비 관우, 장비, 조자룡 등 유비 쪽의 인물만 잘 기억해서 그렇지 태사자도 매우 훌륭한 장군이야. 그는 특히 백발백중의 활쏘기로도 유명했지만, 전략에도 뛰어난 출중한 장군이었지.”
“그래서요? 태사자가 만천과해를 어떻게 했다는거죠?”
“태사자가 적군에 포위되어 성에 갇혀 있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는 매일 아침마다 성에서 나와 적이 보는 앞에서 유유히 활 쏘는 연습을 하고는 다시 성안으로 되돌아가는 일을 되풀이했어. 처음에는 이를 경계하던 적군의 정찰병들도 매일 되풀이되는 태사자의 모습에 나중에는 무심하고 안일하게 되었지. 그러던 어느 날, 평소처럼 성에서 활을 들고 나온 태사자는 갑자기 잽싸게 말을 타고 달려 적진을 홀연히 빠져 나가 버렸다는 거야.”
“그러니까, 적을 안심시켜 결국 의도하는 것을 해냈다는 말이군요?”
“바로 그 말이야. 이거 박성준이랑 얘기했을 때 보다 말이 금방 통해 좋네. 지금 나도 김대리랑 이렇게 자주 외근을 다니며 이팀장 눈에 띄지 않게 그를 안심시키며 제품개발을 차근차근 준비하는 것이 꼭 태사자 같다는 거지. 그러다 언젠가는 나도 태사자처럼 성을 빠져나갈 기회가 있을 거라 생각해. 절대 포기하지 않으면 기회는 반드시 돌아올 거야.”
신대리는 만천과해라는 사자성어를 통해 잊고 있었던 자신의 다짐을 새롭게 떠올리며, 오늘 어처구니 없는 자신의 행동에 스스로도 매우 참담하였다. 자기도 모르게 이팀장이 사육하는 서커스 코끼리마냥 점점 패배자처럼 익숙해져 가고 있는 자신이 스스로도 한심스러웠다. 곧 있으면 새해가 다가 오겠지만, 그에게 새로운 한 해는 절대 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오늘 따라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몹시도 춥고 길게만 느껴지는 밤이었다.
- 계 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