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윤창소설] 인식의 싸움 55. 사업개발팀(12)

“전 사실 참으며 계속 일하려고 했는데, 이젠 못 참겠어요. 어제도 번역하는 일 다 끝낼 수 있었는데, 팀장님이 자꾸 다른 일을 시켜서 제대로 하지 못한 거에요. 근데 그게 중요한 일도 아니고, 회사 일도 아니고 다 팀장님 사적인 일이었어요. 그러니 제가 더 열 받는 거죠.”

송팀장은 업무의 반 이상을 사적인 일에 시간을 보내고 있었으며, 그 대부분의 일이 그녀에게 비밀스럽게 주어지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그녀는 마치 송팀장의 개인 비서 같은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리님, 저는 어떡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대리님이랑 하는 M&C프로젝트 일은 재미있는데, 팀장님 비서 같은 일을 앞으로도 계속해야 한다면 차라리 회사를 더 다니고 싶지 않을 정도에요. 지난 5개월 동안 프랑스 대사관, 상공회의소 및 팀장님 주변의 인적 네트워크를 위하여 상당히 많은 자료가 오갔는데, 저도 처음에는 이 일들이 모두 회사를 위한 일이라 생각했었어요. 그러나 이제 저도 일이 돌아가는 것을 잘 알게 되니, 그 일 대부분이 팀장님 개인적 모임 및 관계유지를 위한 사적인 일이더라고요. 그런데도 대리님은 혼자 회사업무를 위해 온 힘을 기울이고, 이와는 반대로 팀장이라는 사람은 오히려 그렇지 않으니, 저는 속으로 더욱 안타깝기만 하고, 마음이 좋지가 않았어요.”



조윤희는 오늘에서야 비로소 신대리에게 속마음을 다 터 놓게 되자 속으로 그 동안의 답답했던 마음이 다 풀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한 동안 아무 말 없이 골똘히 생각하던 신대리는 의외로 조용하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윤희씨, 오늘 얘기 일단 우리 둘만의 비밀로 했으면 좋겠어. 그래도 현재 프랑스와 연결고리는 팀장님이시니까, 우린 그가 반드시 필요해. 우리 일단 팀장은 없는 거라 생각하고 일하자. 그리고 미안한데, 윤희씨도 하기 싫겠지만, 당분간만이라도 계속 비서 역할을 해주기를 바래. 나중에 분명히 다른 좋은 기회가 올 거라고 믿고 조금만 참고 기다려 줄래, 응?”

그녀는 신대리의 말이 의외라는 생각으로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대리님은 분하지도 않으세요? 저는 진짜 화가 나던데…”
“윤희씨, 나도 지금 무지 화가나. 젠장, 난 왜 이리도 팀장 복이 없는지 속도 무지 상하네. 그래서 송팀장이 그리 건성건성 일했던 점을 이제야 다 알겠어. 그러나 말이야... 지금 내가 뭘 어찌 할 바가 없는 게 더 화가 난다. 이 프로젝트를 위해 나는 사표를 쓰고 온 몸을 던졌는데 말이야. 그래서 일단 화를 내는 것보다 일을 성사시키는 게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 병법36계에 "차시환혼(借屍還魂)"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직역하면 다른 시체를 빌려 혼을 돌아오게 한다는 뜻이야…”

신대리는 그녀를 이해시키기 위해 뭐 좋은 예가 없을까 잠시 생각하는 동안 조윤희가 무슨 뚱단지 같은 소리냐며 물었다.

“차시환혼이요? 갑자기 무슨 시체 얘기에요?”

“이게 원래는 중국 고대 민간소설에 나오는 얘긴데, 얘기하자면 말이 좀 길고…, 뭐 좋은 사례가 없을까....? 아~, 그래~! 삼국지의 조조 알지? 조조~!”

“대리님, 제가 아무리 외국에서 살았어도 조조는 알죠.”

“잘됐네. 그 조조가 동탁을 물리치고 정권을 잡았어도 승상으로 머물면서 황제를 위하는 듯한 자세를 취했거든. 왜냐하면 조조는 대의명분이 필요했어. 자칫 자신이 없앤 동탁과 같은 전철을 밟을 수는 없었거든. 그래서 허수아비 같은 황제를 옹립하면서 황제를 이용하여 자신이 취할 것은 다 취할 수 있었던 거야. 그래서 차시환혼은 별로 가치 없다고 버려진 것들을 다시 이용하여 가치 있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야. 즉, 송팀장도 업무적으로 필요 없는 사람일지 모르지만, 지금 우리의 팀장이고, 우리 팀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선 그의 존재 가치가 필요하단 말이지. 우리는 팀장의 육신과 권한을 빌려 우리의 일을 달성할 수만 있으면 되는 거야. 알겠지?”

“아~ 네, 그런 뜻이었군요. 잘 알겠어요. 대리님, 저 열심히 할게요. 그리고 제가 대리님도 많이 도와 드릴게요. 대리님도 힘 내세요. M&C 꼭 성공해야죠.”

그녀는 이내 다시 이전의 그녀로 돌아온 듯, 활기차게 말했다.
“아니, 내가 윤희씨를 잘 챙겨주지 못해 미안하지, 그렇게 마음 고생했는지도 몰랐으니…. 자 오늘은 이만 들어가고 우리 다음 주에 파리에 계획서 보낸 후 성준이랑 함께 다시 뭉치자. 그 때는 스트레스 다 날릴 정도로 완전히 신나게 놀아 보자고.”

조윤희와 헤어진 후, 신대리는 입 밖으로 새어 나오는 한숨을 참지 못하고 계속 큰 숨을 들이켰으나, 가슴 깊은 답답함과 무거움이 가시지를 않았다. 모처럼 이팀장에게서 벗어나 신대리가 가지고 있지 않은 장점을 가진 좋은 상사를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책임감이 전혀 없는, 회사는 단지 명함 때문에 다니는 것 같은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이다. 결국 신대리는 이 길이 누군가의 도움을 바라거나 대신 해주는 일이 아니라, 어떻게든 그 스스로가 어렵게 헤쳐나가야만 하는 힘들고도 먼 싸움임을 새삼 느낄 수밖에 없었다.

- 계 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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