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윤창소설] 인식의 싸움 23. 시장조사 업무(10)

2006년 10월, 신대리는 마케팅부에서 두 번째 가을을 맞이했다. 벌써 마케팅부에 온지 만 1년이 지났지만, 뭔가 하나라도 변한 게 없었다. 그 동안 신대리는 매월 점점 더 두꺼워지는 충실한 시장조사 보고서를 올렸지만, 언제부터인가 회사는 그냥 익숙하게 읽는 월간지 마냥 그의 보고서를 흘려 넘기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래도 처음 3개월은 뭔가 변화의 조짐이 보였지만, 성수기인 봄에 신제품 출시 일정을 맞추기 위해서 이것 저것 따질 여유가 없다는 이유로, 신대리의 의견, 즉 시장의 의견은 차츰 무시되기 시작했다. 결국 시장 보고서에 대한 처음의 놀라움과 시장환경 분석의 중요성은 신 브랜드인 아미앙떼가 나오면서 잊혀져 갔으며, 모든 사람들이 아미앙떼의 성공을 위하여 전력투구를 해야 한다는 명목 하에, 또 다시 주변은 보지도 않고 무조건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들이 되어, 시장과 고객을 무시한 채 회사의 주장을 고객들에게 강요하는 행동들을 저지르고 있었다.

아미앙떼는 모든 이들의 기대와는 달리 좋은 실적을 만들지 못하였다.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고, 고객의 입장에서 조금만 들여다 보면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일이었다. 신대리는 경쟁사와 시장 트렌드에 대해 이야기하며, 당시 개발 중인 아미앙떼의 비차별적 컨셉과 마케팅 계획에 대해 여러 번 문제점을 제기하였지만, 사람들은 경쟁사 제품보다 품질이 우수한 좋은 제품이라고 주장하며, 신대리를 마치 회사의 불평불만자 또는 냉소적인 비판주의자로 몰아갔다.

결국 봄 성수기를 맞춰 출시된 아미앙떼는 대대적인 광고판촉과 함께 대리점에 대량 주문이 들어가면서 기대에 부응하는 듯 시작하였으나, 상당 부분 반품 및 교품이 되더니, 여름부터는 매출 탄력을 거의 잃고 결국 최대의 성수기인 가을에도 기를 쓰지 못하고 있었다.
수 십억을 투자해서 개발 및 광고를 했지만 아미앙떼는 확실히 실패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는 여전히 그 원인을 찾을 생각은 하지 않고 우수한 기술과 품질의 고보습 제품임을 강조하며 광고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소비자의 인식 속에 들어가려는 노력보다 소비자들을 그들의 인식 속에 가둬 놓으려는 잘못된 짓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신대리는 이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기 위해 쉬지 않고 시장조사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계속 보고서를 올리면, 언젠가 누군가 알아주는 사람이 생길 거라는 일말의 기대를 버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신대리에게도 문제가 없지 않아 보였다. 1년 동안 다람쥐 챗바퀴 굴리듯 안테나 매장에 대한 설문조사, 시장조사 담당자 모임, 그리고 알아주지 않는 시장조사 보고서 작성을 틀에 박힌 듯 반복하다 보니, 의욕도 처음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작년 말 보강된 두 명의 신입사원 중 한 명이 영업부로 이동 배치되었어도, 남아있는 한 명의 후배 사원이 어느 정도 제 역할을 다할 정도로 시장조사업무는 체계적으로 틀이 잡혀있었기 때문에, 1개월 중 반만 일해도 사실 할 일이 별로 없을 정도였다.

그는 점차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회사를 탓하며,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업무시간에 책을 읽거나, 과거 배웠던 PC 공부를 더욱 보강하는 등 어찌 보면 근무태만이라고 할 정도로 나태해 보였다. 그래서 어쩌면 회사에서도 천편일륜적인 틀에 박힌 그의 보고서를 마치 의례의식처럼 읽고 지나치게 된 것도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를 논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결국 회사의 어려움은 전 부서의 총체적인 문제였다.

신대리의 예견대로 1년이 지나자 화장품전문점들의 브랜드숍 전환은 눈에 띄게 증가하였다. 또한 시장의 양대 거대세력인 1, 2위의 대기업은 막대한 자본력으로 자신들의 브랜드를 내건 편집숍이라는 새로운 유통을 만들었다. 기존의 대형 화장품전문점과 별다른 점이 없는 이 매장들은 대기업 브랜드를 50% 이상 구성하는 조건으로, 다른 회사들의 제품을 채울 수가 있는 곳이었다.

점점 경쟁력이 약화된 화장품전문점들은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자신의 간판을 대기업 간판으로 바꿔야 했으나, 당초 약속과는 달리 대기업 제품의 구성비중은 50%가 아니라 점점 더 늘어가게 되어 중소기업의 제품들은 그 매장에서 더욱 자리를 차지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 화장품 전문점 수가 계속 줄어들자, 그 전문점들과 거래 하는 회사의 대리점 수도 확연하게 줄어드는 바람에, 회사는 매출의 공백을 커버하기 위해 대리점을 대신할 직영영업소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직영영업소는 대리점이 철수하는 공백 지역을 회사가 직접 운영하여 이를 정상화시킨 후, 신규 대리점을 희망하는 사람에게 다시 넘김으로써, 매출 기회 손실을 방지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막상 회사 직원이 직접 전문점을 대상으로 영업을 해보니 대리점이 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매출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사실 그 지역에서 철수할 수 밖에 없는 대리점 수준이란 것이 워낙 영업력이 떨어진 것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목표의식이 투철한 회사 영업사원들의 경쟁력과 회사의 강한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대리점보다 2배 이상의 매출을 달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자 회사는 아미앙떼의 매출 목표 달성을 위해 직영영업소를 증가시키기 시작했다. 이제는 새로운 유통의 시대적 흐름에 눈 뜨고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려는 노력보다, 직영영업소를 증가시키는 것이 회사의 유일한 목적이 된 것이다. 그러나 경영진은 단기적인 매출 증대라는 것에 눈이 가려져서, 직영영업소가 가지고 있는 어마어마한 문제점을 간과하고 있었다. 그 후 직영영업소 때문에 회사에 최대 위기가 도달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그때는 아직 어느 누구도 이를 눈치채고 있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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