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윤창소설] 인식의 싸움 71. 마케팅 밀림 속을 헤매다(7)

갓 인쇄되어 나온 따뜻한 종이 한 다발을 가지런히 철한 후, 신대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엄청난 피로가 몰려오는 것 같았다. 벌써 밤 9시가 넘었다. 안산의 금형 거래선을 방문하고 사무실에 들어온 때가 오후 7시였다. 사무실은 오늘따라 모두 일찍 퇴근했는지 아무도 보이지가 않았다. 
   
오늘에야 말로 꼭 브랜드숍 런칭 품의서를 끝내고 말겠다는 욕심에 저녁 식사도 거른 채 너무 일에 몰두했나 보다. 그리고 마침내 신대리는 책상 위에 품의서와 각종 첨부문서들이 수북하게 쌓여있는 것을 대견스레 바라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일 하나를 드디어 끝냈다는 기쁨보다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막다른 길목에 처해 있는 자신의 모습이 스스로도 안타까울 뿐이었다.
     
  ‘이제 런칭 품의도 다 끝났는데, 이팀장의 결제를 받아야만 하니….’

  나오는 것은 한숨뿐이었다. 그때 고요한 적막을 깨고 전화벨이 울렸다. 함께 안산에 다녀온 김대리였다.

  “아직 안 들어 가셨어요?”
  “응, 런칭 품의서를 마무리 하느라고, 그런 김대리는 왜 여태 있어?”
  신대리는 그간 협력업체를 함께 다니며 김대리와 매우 친해져서 세살 터울인 그에게 자연스럽게 말을 놓게 되었다.
  “저도 들어와서 일 좀 정리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네요. 근데 식사는 했어요?”
  “아, 그러고 보니 밥을 안 먹었네?” 
  갑자기 시장기가 몰려오는 것 같았다.
           
  “그럼 지금 같이 나가시죠. 남들은 거창하게 회식도 한다는데….”
  “응? 회식이라니?”
  “몰랐어요? 오늘이 민이사님 환영회라던데….”

  순간 신대리는 꽝 하는 듯한 충격에 말문이 막혔다. 뭐라 말하는지 전화기 넘어 김대리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져 가는 듯 했다. 그러나 이내 이제는 이런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 익숙하다는 듯이 어느새 그의 입가에는 외로운 웃음만이 번졌다.

  “그래? 어쩐지 아무도 없더라고? 어디 이런 일이 한 두 번인가, 뭐? 우리도 같이 소주 한잔 하고 들어갈까?”

  “그러죠, 정문에서 봐요.”
            
  식당들이 벌써 문을 닫은 관계로 둘은 통닭 한 마리를 시키고 차가운 맥주를 크게 한 모금 들이켰다.

  “근데 어떻게 알았어?” 뜬금없는 소리에 김대리는 의아해 하며 물었다?
  “네? 뭘요?”
  “오늘 민이사님 환영회 있는 거 어떻게 알았냐고?”
  “아까, 8시쯤인가? 심대리가 퇴근하면서 얘기해주던데요? 신대리님이랑 안산 다녀왔다고 했더니, 신대리님은 회식 안 간데? 하면서….”

  신대리는 한동안 아무 말도 없이 맥주 한잔을 다 비우더니, 500 한잔을 더 시켰다.
         
  “김대리, 내가 지금 거래선을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밤 늦게는 사무실에서 혼자 남아 이렇게까지 일할 필요가 있을까? 민이사님 오신지 2주 동안 난 만나보지도 못했고, 심지어는 회식하는지도 모르는 철저한 왕따인데 말이야. 나 혼자 잘났다고 이렇게 설친다고 뭐가 잘 될 수 있겠어? 어차피 이팀장이란 큰 벽이 딱 가로 막고 있는데 말이야.” 

  신대리의 체념 섞인 말에 김대리가 펄쩍 뛰며 말했다.
        
  “무슨 소리에요? 벌써부터 약한 소리하시면? 이제 막 시작인데요. 우린 갈 길이 아직 한참 멀었어요. 아직 민이사님이 상황 파악하시느라 정신 없어서 그러시겠지만, 결국 M&C와 신대리님은 다시 표면 위로 부상될 겁니다. 회사의 미래 주력 브랜드와 사장님이 신임하시는 신대리님을 이팀장이 언제까지 막을 수 있겠어요? 걱정 마시고 자 술 한잔 하시죠?”
     
  그 때였다. 왁자지껄한 소리와 함께 한 무리의 사람들이 호프집으로 몰려 들어왔다. 마케팅부 사람들이었다. 1차를 끝내고 2차로 이곳에 온 것임에 틀림없다. 신대리는 애써 그들을 외면하려고 하였지만, 이내 그들에게 발견되었다. 누군가 신대리를 부르며 손짓을 하였지만, 바로 이팀장에게 제지 당하는 것 같아 보였다.
        
  “김대리 그만 나가자.”

  신대리는 얼른 일어나 입구 쪽 계산대로 달려갔다. 그때 마침 문을 열며 민이사가 들어왔다. 신대리는 얼떨결에 고개 숙여 그에게 인사하였다. 민이사도 바로 인사를 받으며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어, 그래. 근데 누구지? 어느 부서에 있나?”

- 계 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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