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계획서를 만드는 일은 앞서 걱정했던 것 보다 의외로 쉽게 풀려갔다. 이런 식의 외국 회사에 Business Proposal을 해 본 경험이 없던 신대리는 아직 컨셉 조차 정립되지 못한 M&C의 사업계획을 어떻게 작성할까 고민이 많았지만, 경험이 많은 송팀장이 이번처럼 초기에는 구체적인 컨셉이 없어도 전반적인 사업방향에 대해서만 다루면 된다고 가이드를 주자 일이 일사천리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사실 사업방향은 이미 오래 전부터 세워져 있었기 때문에 이를 좀 더 구체적이고 세련되게 정리한 후, 향후 5개년 매출계획과 손익 정도만 추가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5년간의 매출을 예측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M&C의 브랜드숍이 아직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섣불리 매출을 전망한다는 것은 더욱 힘든 일이었다. 신대리가 구상하고 있는 것은 일단 직영 브랜드숍을 5개 정도 오픈하고 이를 플래그쉽 스토어(Flagship Store)로 활용하여 프랜차이즈 매장을 확대하겠다는 것이었는데, 이럴 경우 회사의 영업부도 하나 더 새로 조직해서 별도의 사업부처럼 이원화해야 하는 한편, 새로 영업부 직원들도 모두 뽑아야 한다는 가장 큰 문제가 남아 있었다.
기존 영업조직이 있지만 아직 화장품전문점 시장을 완전히 포기할 수는 없기 때문에, 점차 신규사업이 확대되어 하나로 통일 되기까지는 두 개의 사업부가 공존해야 해서, 재무적으로 고정비 부담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경영진을 설득하기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어제 회의를 통해 사업계획 작성에 대한 업무 분장대로 하루 종일 자료를 준비한 팀원들은 저녁이 다되어서야 다시 모일 수 있었다. 그 동안 준비한 자료를 다시 사업계획 틀에 맞춰 정리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새 하루가 뚝딱 지나가 버렸다.
먼저 신대리가 말문을 꺼냈다.
“저는 한국 화장품 환경분석과 이에 따른 SWOT분석을 했고, M&C의 STP전략의 일환으로 경쟁사와 차별화된 포지셔닝 전략을 수립했습니다. 그 동안 있었던 자료들을 최근 것으로 Update하는 한편, 최근에 했던 M&C에 대한 리서치 결과도 포함시켰습니다. 그리고 자료가 되는 대로 조윤희씨에게 넘겼는데, 윤희씨, 번역은 어떻게 되고 있지?”
”네, 아직 다 못했는데요…, 생각보다 많이 힘드네요. 이제 환경분석 끝냈는데, 일단 된 것부터 팀장님께서 검토해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래요. 일단 다 된 것은 내게 넘겨주세요. 그럼 4P전략은 어떻게 되었지요?”
송팀장이 박성준을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눈길로 질문을 던졌다.
“네 팀장님, 그게 다른 건 다 되었는데, 유통(Place)에 대해서는 제가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제품(Product), 가격(Price), 프로모션(Promotion)에 대해서는 이미 저희가 개괄적으로 수립했던 방향을 이번 계획서 틀에 맞게 다시 정리할 수 있었지만, 유통부분이 아직 명확하지 않아서….”
박성준은 말을 끊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신대리를 힐끔 보며 말을 이었다.
“이건 아무래도 대리님께서 손을 봐줘야 될 것 같습니다.”
신대리도 한숨을 푹 쉬며, 박성준의 말이 끝나자 마자 바로 말을 이었다.
“팀장님, 이 부분은 아무래도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아직 경영진에서 의사결정을 못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이번엔 저희 주장대로 보내고 나중에 다시 보완하는 것이 어떨까요?”
신대리는 이 정도면 기한 내 사업계획서를 끝낼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송팀장이 당연히 그의 의견에 동의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송팀장의 대답은 의외였다.
“회사를 대표해서 다른 회사로 나가는 중요한 문서를 내 마음대로 보낼 수는 없습니다. 특히, 유통조직에 대해서는 매우 민감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내가 책임질 수 없는 일이라서, 빨리 신대리가 경영진의 정확한 의견을 받은 후에 마무리 짓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팀장님, 그러면 미셸리에게 제시간에 자료를 보낼 수 없습니다. 이제 이틀 남았습니다. 그 간 4개월 동안 결론 나지 못한 문제를 어떻게 이틀 만에 결재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일단 M&C 본사를 설득하는 문제부터 해결하고, 경영진 문제는 나중에 해결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송팀장은 지금까지 사람 좋았던 사람이 갑자기 바뀐 것처럼 완고하게 물러서지 않았다.
“신대리 말도 안돼요. 경영진 재가가 나지 않은 자료를 난 함부로 보낼 수 없습니다. 다른 방안을 강구하기 바랍니다. 난 오늘 약속이 있어서 그만 퇴근 할 테니, 내일 아침에 다시 얘기합시다.”
“팀장님, 그럴 수는 없습니다. 지금이 어떤 시기인데….”
신대리의 말을 뒤로한 채, 송팀장은 일방적으로 자리를 떠났다.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허탈한 듯이 말문을 열지 못하며, 송팀장이 사라진 문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 계 속 -